1. 미카엘 요정의 눈가리개
1-1. 내용 요약
오즈의 마을에서 장애인 동생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다람쥐 소녀는, 수해로 인해 실종된 부모님을 찾아다니다 우연히 마을 주민들의 논쟁을 듣게 되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소녀는 이후 자연스레 정의를 찾아 나서게 된다. 마을 한가운데 살고 있던 정의의 여신 미카엘 요정은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찾아갔지만, 오히려 소녀에게 정의를 찾아 달라며 무지개를 내어준다.
미카엘 요정은 눈가리개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누가 씌웠으며, 그것을 쓰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느라 바빴다.
1-2. 인상 깊었던 부분과 이것을 통해서 하게 된 생각들
정치 우화에서 미카엘 요정으로 표현되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가리개를 쓰고 있는데, 이는 편견을 갖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한다. 그러나 우화에서 미카엘 요정은 눈가리개를 쓰고 있음에도 정의를 규정하기 어려워했다.
놀라웠던 것은 정의의 여신 모습이 사회마다 시대마다 달랐다는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눈가리개를 누가 씌웠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었고, 그것을 누가 씌웠는지, 왜 씌웠는지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내가 알고 있던 정의의 여신 모습에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 그 모습을 바꾸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현재 내 눈에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다면, 아마도 미카엘 요정이 가졌던 의문조차 갖지 못한 채 눈가리개 속에 갇혀버렸을지도 모른다. 정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옳음과 좋음의 상태에 대한 견해이다. 이번 학기 정의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접하면서 나 자신만의 원칙을 세워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어느 때에 눈가리개를 쓰고 또 벗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
2. 트롤리 딜레마
2-1. 내용 요약
일명 ‘트롤리 딜레마’로 불리는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 기차가 질주하고 있는데, 한쪽 철로에는 사람 다섯 명이 누워있고 다른 쪽 철로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다. 트롤리를 잡아당기면 한 명이 누워있는 위쪽 철로로 올라가고, 놔두면 다섯 명이 누워있는 아래쪽 철로로 달리게 된다.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89%가 위로 올라가게끔 조절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다섯 명이 죽는 것보다는 한 명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공리주의자들의 기본적인 발상이기도 하다.
조건이 조금 다른 딜레마도 있다. 기존의 그림과 같이 기차는 달리고 있다. ‘나’는 다리 위에 서 있고 옆에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 있다. 선로 저편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누워있지만, 이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리면 기차를 멈추고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 한 사람을 희생시키면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앞의 그림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사람들의 선택은 달랐다. 실제 조사에서는 11%만이 이 사람을 밀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조건이 바뀌니 선택이 달라졌다.
2-2. 인상 깊었던 부분과 이것을 통해서 하게 된 생각들
많은 사람이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그림을 봤을 때는 나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다섯 명을 죽게 하는 것보다 한 명을 희생시키는 선택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큰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을 보고 나서는 내 선택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차마 ‘나’의 옆에 있던 그 사람을 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다수를 불편하게 만드는 소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들이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제나 희생당하는 쪽은 약자였고, 소수였으며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사람은 상황에 따라 소수가 될 수도, 약자가 될 수도 있다. 누구든 선로 위에 누워있는 한 명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다수에게만 정의로운 반쪽짜리 사회가 되지 않도록,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3. 영화에 나타난 불평등 사회 : 정의의 관점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은 공동체에는 세 계급이 존재하고, 이 계급이 조화롭고 이상적일 때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플라톤이 주장한 유토피아에 나오는 나와 타자의 관계는 매우 위계적이다. 애초에 나와 타자는 다른 자질과 재능,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 사이의 위계 그 자체를 정의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태어날 때부터 부여된 선천적 지위는 사람을 너무 비참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고 모두가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를 원하며,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모두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이런 사회를 두고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생충의 결말은 모두의 파멸이었다. 불평등이 심해지다가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모두가 파멸할 수 있다는 걸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잘할 때 공동체가 조화롭게 돌아갈 수 있다는 플라톤의 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계급과 능력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불평들이 인간의 삶을 해치지 않는 최소한의 장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그 누구도 비참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길 희망해 본다.
4. 한국 사회의 정의; 2022년 8월 폭우로 인한 반지하 일가족 참변 사건
2022년 8월 역대급 폭우로 서울 곳곳이 물에 잠겼다. 갑자기 쏟아진 빗물은 여러 반지하 건물을 집어삼켰는데, 안타깝게도 신림동의 한 반지하 주택에서 폭우로 인한 침수로 일가족 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지만 이번 폭우 피해는 빈곤층에게 더 잔인했던 것 같다. 이미 2년 전 국토부가 침수 피해 위험이 있다며 ‘핵심 관리 가구’로 지정했었으나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소통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한 인재, 국토부와 서울시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신림동 반지하 주택을 포함해 관리 대상이었던 반지하 가구 814곳은 침수 피해를 입었다.
사고 발생 후 대통령실에서는 사람이 죽어간 참변 현장 방문 사진을 홍보용으로 사용했고, 서울시는 안전에 취약한 주거 환경을 애초에 차단하겠다며 ‘지하, 반지하’ 주택 폐지를 대책으로 내놓았다.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의는 무엇일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정의란 단지 조금 더 가진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명예와 위신을 위한 ‘척’인 것 같다. “모두에게 자유가 주어졌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나 ‘너’의 노력이 부족했어, 다 네 탓이야”라는 말과 함께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층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척, 다시 말해 정의로운 척하는 것일 뿐 진짜 정의는 사라져버린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대통령실 홍보물 사진을 비난하는 수많은 네티즌이 존재하고, 여러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서울시가 내놓은 정책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며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리는 작지만 곳곳에서 각자의 정의를 외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분명 정의로운 개인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과정 중에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면 우리 사회도 조금 더 정의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참고문헌]
- 유범상, 유혜숙(2022), 사회복지 정의론
- https://www.nocutnews.co.kr/news/5801175
- https://www.mbn.co.kr/news/society/4845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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